가난한자의 주일(청년부의 문제?)
가난한자는 주일 아침에 일어나 교회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화가나고 심장이 뛰었다.
내년도 리더를 세워야한다고 하면서도 자기들끼리만 웃고 떠드는 모습이 혐오스럽고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준비를 하고 교회에가며 지난주에 처음본 새가족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그저 우두커니 않아 예배드리고 떠나는 뒷모습이 기억나고 죄의식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그 사람이 만약 하나님을 만나지못하고 예수를 통해 구원받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받을때 나를 지목하며 외치지 않을까? 저자는 내가 실족할때 나를 보고만 있었다고 청년부 리더랍시고 서서 자기들끼리만 시시덕거리고 나는 본채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애써 내가 리더로있는 셀에 배정된사람이 아니라고 새가족팀이 그를 맞아 나에게 소개를 해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자위하고 핑계를 대며, 오히려 그 새가족이 내 얼굴조차 모른채로 청년부가 잘운영되고 있는 다른 교회로 가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교회에 도착해 섬기는 아동부서로 향했다.
그리고는 예배준비를 하지만 마음속의 죄의식은 억울함으로, 억울함은 분노로 변해 버렸고 가난한자는 속으로 그 분노와 억울함을 하나님께 쏟아내었다.
“하나님 만일 새가족이 그대로 실족한다면, 하나님앞에서 심판받을 때 나를 지목하며 왜 나를 돕지 않았냐고 외칠까 두렵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세상의 소금으로 세우셨는데 나는 짠맛은 커녕 작은 무쪼가리 만큼의 시원함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나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억울합니다. 내가 실패한게 아닙니다.
하나님 이건 저 새가족팀이 자기 역할을 안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새가족보다 일찍가서 예배를 준비하고 예배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나옵니다. 새가족팀이 인사시켜주지 않는 새가족과 만날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청년부가 이렇게 된건 요 몇년간 아무런 목적없는 멍청한 새끼들이 청년부 회장이랍시고 떠들면서 병신짓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는 할만큼 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변해야 한다고 외쳤고 기도해야한다고 성경읽어야 한다고 기도회를 하자고 성경읽기모임을 하자고 청년부가 나아갈 목적을 가져야 한다고 계속 외쳤으나 그저 공허했습니다.
다 저들 때문입니다.
내가 운영하던 셀에서는 항상 리더들이 나왔습니다. 리더로 섬기지 못한 셀원들도 몇개월만, 한해만 더 신경쓰고 양육하면 모두가 리더가 될 수 있었는데 지금 섬길 사람이 없는것은 셀원들을 이어받은 다음 셀리더들이 자기역할은 하지도 않고 그저 셀리더가 버겁다고 징징거리기만 했기때문입니다.
하나님 그리고 실제로 많은것에 문제가 생기고 있는데 청년부 부장 집사라는 작자는 하나하나 개선해 갈 실제적인 방법에 대한 생각이나 고민은 없고 그저 병신같이 원론적으로 맞는말만 그저 좋은게 좋은말만 하고 청년부외 교회와 다른 부서와 소통이 안되서 계속 불협화음이나고 삐그덕 거리는데 그저 나이브하게만 구는 것도 문제입니다.
교회를 섬기는게 직장이면서도 그저 기계처럼 설교하고 거들먹거리며, 대우 받지 못하면 속으로 꿍해있으면서 모든책임은 회피하려하고 문제제기에는 도망만 다니는 찐따같은 목사도 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는 이 모든일에 나는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죄가 없습니다.”
하지만 가난한자는 아무리 하나님께 화를 쏟아내고 내죄가 아니라고 말해도 개운해지기는 커녕 더 찝찝해졌다.
오히려 억울함을 성토할 수록, 이 죄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손씻고 부인하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준 빌라도의 모습만 떠올랐다.
가난한자는 더더욱 억울해졌다.
자신은 최대한 할만큼 한것같은데 왜 내가 빌라도란 말인가? 이럴거라면 교회가 청년부가 짐이되고 죄책감이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지도 못하고 매여 고통스러울거라면 차라리 하나님을 몰랐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세상의 기쁨으로, 비록 영원한 의미는 없을 일시적인 쾌락으로라도 나를 채우고 살았을텐데…
그러던중 가난한자의 귀에 아동부아이들의 찬양소리가 들린다
“주님 오셨네 저 별처럼 온 세상 환히 비추며, 주님 오셨네 저 눈처럼 내 모든 죄 덮어 주셨네”
가난한자는 그제서야 예수님이 내 죄때문에 이세상에 오셨음을 기억했다.
죄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죄인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핑계댈 마음이 눈녹듯 사라졌다. 이미 모든죄는 예수님이 덮어주셨다는것을 다시 깨닳았다.
가난한자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자의 마음에는 아직 문제가 남아있었다.
하나님께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맡기셨는데 청년부를 비추고 청년부에 짠맛을 넣지 못했기 때문이다. 죄에서 벗어나더라도 청년부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또 다시 자괴감이 찾아왔다. 나는 왜 소금이 되지 못하는가? 결국 짠맛을 잃고 길가에 버리워져 밟힐뿐일까?
그런생각을 하며 뒤숭숭하게 아동부 예배를 마쳤다.
이후 3부예배 성가대인 가난한자는 성가대 연습실로 향했다. 은혜롭고 좋은 찬양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고 찬양이 제대로 될리 없었다. 예배시간에 찬양대로서도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어떤 스승과 제자가 있었는데, 제자는 사소한 일 때문에 잔뜩화가나서 스승에게 억울함을 쏟아놓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한줌의 소금을 가지고 물 한그릇에 타서 제자에게 마시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얼굴을 구기고 헛구역질을 하며 물을 마셨고 결국 다 뱉어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소금을 이렇게 많이 넣은 물은 짜서 도저히 마실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다시 소금한줌을 주며 호수에 넣고 그 물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짠물을 마셔 입이 마른 제자는 호수에 소금을 던지고는 그 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그모습을 본 스승은 소금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그 소금을 탄 그릇이 작은것이라 말하며 네가 화가난일은 소금같은것인데 호수와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면 소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일러주었고 제자는 큰 깨닳음을 얻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가난한자는 오히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나를 세상의 소금으로 만드시긴 하셨는데 내가 너무 적은 소금이 아니었을까? 한 줌 소금으로 오이를 씻을수도 있고 고등어를 절일수도 있는데 내가 하나님께 나는 왜 호수를 짜게 할 수 없냐고 징징댄게 아니었을까?
(결론은 이상하지만 이 이야기는 가난한자 본인의 실화를 바탕으로...)